다산 정약용은 1801년 정적들의 공격을 받아 귀양길에 오른다. 그는 마지막으로 선영을 찾아 하직 인사를 하는데, 그때의 무너지고 꺾이는 자신의 처절한 심정, 억장이 무너지는 심정을 이렇게 쓰고 있다.
아버지 아십니까 모르십니까?
어머님 아십니까 모르십니까?
우리 가문 갑자기 뒤집어져서
죽고사는 문제가 이 지경이 되었네요
목숨만은 겨우 부지했지만
이 몸은 슬프게도 무너졌어요.
자식 낳아 부모님 기뻐하시며
잡아주고 끌어주고 애써 길렀는데
부모은혜 응당 갚으리라 말했는데
이같이 꺾이리라 생각엔들 했겠어요”
이때, 다산은 모든 것이 끝난 것 같은, 세상이 끝난 것 같은 그런 심정이었다.
물론 양반관료서의 인생은 끝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인생의 끝은 아니었다.
모든 것이 끝난 것 같은 귀양길, 그러나 그 길이 조선 실학의 집대성으로 향하는 길이었다는 것을 다산 자신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아마 다산이 양반관료로서 무사하게 일생을 마쳤다면 우리는 역사책에서 그의 이름을 볼 수 없었을 것이다.
정말 사람의 일이란 것은 이렇게 알 수 없는 것이다.
대개의 경우, 귀양을 가면 폐인이 되다시피 한다.
서울로 돌아갈 그 날만을 애타게 기다리면서 술이나 마시고 잠이나 자면서 세월을 보낸다. 그렇게 몇 년을 보내면 사람이 무뎌지고 망가지는 것이 보통이다.
다산의 귀양살이는 18년간 계속된다. 산천이 두 번을 변하고 쇠가 녹이 슬어도 한참을 녹스는 긴 세월, 그 고독한 고립무원의 세월에 그는 오로지 공부와 저술에 매달렸다. 돌아갈 기약도 없는 그 세월에 무섭게 공부했다. 실학의 금자탑이라 할 수 있는 ‘다산학’은 그렇게 쌓아올린 것이었다.
어떤 이들은, 귀양살이의 모진 체험이 다산으로 하여금 현실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확립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귀양을 간다고 다 비판적이 되는 것도 아니고 실학자가 되는 것도 아니다. 문제는 인생의 ‘역경’을 ‘조건’으로 바꿀 수 있는 강인한 의지와 철저한 자기관리 능력이다.
우리가 배워야 할 바도 그 점이다.
주변에서는 다산에게 그렇게 권했다. 권세가들에게 굴복을 하고 구명운동을 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다산은 단호했다.
“내가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도 천명이요, 살아서 돌아가지 못하는 것도 천명이다.
그러나 사람이 해야 할 도리를 닦지 않고서 천명만을 기다리는 것은 또한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다.
나는 사람이 닦아야 할 도리를 다했다. 사람이 닦아야 할 도리를 이미 다 했는데도 끝내 돌아가지 못한다면 이 또한 천명일 뿐이다.”
자기 삶에 대한 확신, 그의 결연한 지조와 절개가 오늘의 우리를 무참하게 만든다.
영남대 국사학과 교수·baeysoon@y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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