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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해후
 

작성자 정계영 글번호 206
홈페이지 메 일 ynsseoul@hanmail.net
작성일 2009-06-04 04:07:16 조 회 11087

12년 만의 邂逅(해후) -황장엽 “이제 앞으로는 우리 함께 투쟁하자”


☞ 5월30일 서울 황장엽 씨 사무실을 찾은 김현희 씨와 황장엽 씨

어떤 邂逅 - 黃長燁ㆍ金賢姬의 만남이 있어 소개 해봅니다.

김현희(金賢姬) 씨가 지난 30일 모처럼의 서울 나들이를 했다. 이번 서울 나들이의 목적은 황장엽(黃長燁) 씨를 방문하는 것이었다. 이래서 31일 오후 서울 강남에서 황장엽 씨가 집필과 지인 면담에 사용하고 있는 사무실에서 매우 이색적인 만남이 이루어졌다. 김현희 씨는 주지하는 바와 같이 1987년 인도양 상공에서 발생한 KE858 여객기 공중폭파범 가운데 한 사람이었고 황장엽 씨는 그로부터 10년 후인 1997년 <조선노동당> 비서국 비서의 자리를 팽개치고 대한민국으로의 탈북을 단행한 사람이다.

이날 두 사람의 만남에는 특이한 경력을 가진 또 한 사람의 여성이 자리를 함께 했다. 탈북 무용가 김영순 여사다. 김 여사는 북한에서 김백봉(金白峰)과 함께 최승희(崔承喜)로부터 무용을 사사(師事)한 사람이다. 그러나, 김 여사는 월북작가 이기영의 아들 이평과 결혼생활 중 김정일과 눈이 맞아 이평과 이혼하고 김정일의 여자 가운데 하나가 되어 그의 큰 아들 김정남의 어머니가 된 성혜림(成惠林)의 고등학교 동창생으로 그녀의 경력을 잘 아는 사람의 하나라는 것이 화근이 되어 9년 동안 <요덕수용소>에 갇혀 지내다가 풀려 난 뒤 2001년 북한을 탈출하여 중국과 동남아를 거쳐서 2004년 대한민국에 도착한 전설적인 인물이다. 탈북 무대감독 정성산이 제작하여 국내외에서 공연이 계속되고 있는 화제의 뮤지칼 <요덕 스토리>는 바로 김 여사의 <요덕수용소> 생활을 소재로 한 것이다. 김현희 씨로부터 “찾아뵙고 싶다”는 희망을 전해들은 황장엽 씨는 30일 자신의 사무실에 조촐한 뷔폐 음식을 준비하고 이 자리에 김영순 여사도 초청한 것이다.

황장엽ㆍ김현희 두 사람의 만남은 12년만에 이루어지는 것이었다고 했다. 그녀와 황장엽 씨 사이의 첫 번째 만남은 황장엽 씨가 일본여행으로부터 귀국 길에 들른 베이징에서 탈북을 단행한 1997년에 이루어졌었다고 한다. 그때 김현희 씨는 지법ㆍ고법ㆍ대법원의 3심에서 모두 사형선고를 받았었으나 김영삼(金泳三) 대통령(당시)의 대한민국 정부가 사면(赦免)의 은전(恩典)을 베풀어서 자유의 몸이 된 상태로 국가안전기획부 직원의 신분을 가지고 있었다. 이때의 사면 조치는 그녀가 북한이 저지른 ‘국가범죄’였던 KE858기 공중폭파의 진상을 밝힌 데 대한 장공속죄(將功贖罪)의 차원뿐 아니라 아직 북한이 이를 시인할 것을 거부하고 있는 상황에서 앞으로 언젠가 북한의 시인을 끌어낼 때까지 증인으로 보호되어야 할 가치가 있다는 국가적 판단에 입각한 것이었다.

김현희 씨는 1997년 당시는 그를 심문하는 국가안전기획부(국가정보원 전신)의 수사관이었던 남편과 결혼한 뒤 시댁 가족들의 생활의 터전인 경상북도로 내려가 1남1녀의 어머니가 되었다. 1997년 그녀가 북한을 방금 탈출한 황장엽 씨를 만났을 때 그녀는 아직 결혼 전이었다. 그러나, 이때 김현희 씨의 생애에는 먹구름이 휘덮이기 시작하고 있었다. 1998년 김대중(金大中) 정권의 등장으로 ‘좌파’ 천하가 된 대한민국에서는 2003년 노무현(盧武鉉) 정권 출범과 더불어 국가정보원을 사실상 장악한 ‘친북ㆍ좌파’ 세력이 이른바 ‘과거사 진상위원회’를 조종하여 KE858 폭파를 “북이 아니라 남이 일으킨 사건”으로 몰아붙이고 그 과정에서 김현희 씨를 가리켜 “실재(實在)하지 않았던 조작된 가공적(架空的 인물”로 매도(罵倒)하면서 그녀에게 TV 출연을 통한 ‘양심고백’(?)을 강요하기 시작했다. 이 같은 ‘친북ㆍ좌파’ 세력에 의한 집요한 시달림을 견디지 못한 김현희 씨 일가는 살던 집을 버리고 시골의 한 작은 도시의 전화도 수도도 없는 허름한 ‘옥탑방’에서의 ‘피난’ 아닌 ‘피난’ 생활을 6년째 이어 오고 있다.

30일 오후 2시 강남의 황장엽 씨 사무실에서 이루어진 세 사람의 만남은 감동적이었다. 남쪽에 도착한 김영순 여사에게는 세상에 살아남은 단 하나의 피붙이인 아들 한 명이 뒤따라 와 살고 있다. 그러나, <요덕수용소> 안팎에서 부모와 두 아들을 잃어버리고 또 다른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수용소’로 따로 끌려간 남편과는 소식이 두절된 채 살고 있는 김영순 여사를 뒤쫓아서 남에 도착한 아들은 탈출 과정에서 북한 보위부에서 당한 고문 때문에 정상생활을 할 수 없는 병골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황장엽 씨와 김현희 씨는 북에 남겨 둔 가족들의 생사를 모르는 처지다. 이날도 김영순 씨가 겪은 고난이 잠시 화제가 되자 황장엽 씨는 “성혜림이 모스크바로 가서 귀국을 거부하자 북한의 국가보위부는 성혜림을 아는 사람들 수백명을 쥐도 새도 모르게 모두 죽였다”면서 김영순 여사가 그래도 살아서 대한민국 땅을 디디고 살게 된 것만 해도 고마워 할 일이라고 위로했다.

김현희 씨가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 와 기다리고 있던 황장엽 씨와 연출한 만남의 모습은 갈 데 없이 늙은 아버지와 친정으로 근친(覲親)을 온 딸 사이의 해후(邂逅)였다. “어서 와라. 그 동안 사선(死線)을 돌파하면서 용케도 이렇게 살아 있으니 다행이다.” (황장엽) “12년 만에 뵙습니다. 그 동안 건강을 염려했는데 이렇게 건강하신 것을 보니 그렇게 기쁠 수 없습니다.” (김현희) 그 다음에 이어진 황장엽 씨의 말은 노인답지 않았다. 그는 그녀의 손을 부여잡고 말했다. “이제 앞으로는 우리 함께 투쟁하자.”

김영순 여사가 끼어들었다. “1987년 일어난 KAL기 폭파와 그 뒤 김현희 씨에게 생긴 일을 그때 함흥에서 보도를 통해서 알았었다”는 것이었다. 김영순 여사의 스승 최승희에 관한 추억담이 오갔다. 김현희 씨는 그녀의 어머니가 개성 사람으로 무용을 좋아 해서 그녀가 어렸을 때 최승희에 관한 많은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이 난다는 것이었다. 사무실 옆 회의실에 마련된 뷔페 식탁에서는 김현희 씨의 두 아이들에 관한 이야기가 화두(話頭)가 되었다. 김현희 씨는 “초등학교 3학년인 아들을 유치원을 보내지 못한 채 초등학교에 입학시켰더니 처음 한 동안은 학교로부터 귀가할 때마다 ‘너무 힘든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더니 얼마 후부터는 학교 공부를 제법 잘 따라가고 있다”고 말했다.

황장엽 씨와 김현희 씨는 모두 굉장한 소식가(小食家)였다. 누군가가 김현희 씨의 소식을 지적하면서 “남편이 벌이가 좀 적어도 먹는 걱정은 없겠다”고 농을 걸자 김현희 씨는 “그러나 아이들이 있잖아요. 특히 큰 아이인 아들녀석이 반찬 투정을 할 때가 더러 있어서 그때마다 나는 ‘이북의 어린이들이 얼마나 굶주리고 사는지 아느냐. 반찬 투정을 하면 이북으로 보낼까보다’ 라고 욱박지르기도 한다”고 대꾸를 해서 듣는 이들이 웃음을 터뜨리게 만들기도 했다.

늦은 점심 식사를 끝내고 “선생님은 제가 어려울 때마다 마음으로 의지하는 큰 스승님”이라면서 “오래오래 건강하시라”고 작별을 고하는 김현희 씨에게 황장엽 씨는 “잠깐이면 늙는 것이 인생이니 시간이 있을 때 반드시 공부에서 손을 놓지 마라”면서 <인간중심 철학원리>와 <회고록> 등 그의 저서 보따리를 안겨주었다. 김현희 씨는 그가 시골에서 들고 온 ‘청도 반건시’라는 상표의 곶감 두 상자를 황장엽 씨 손에 쥐어 드렸다. 황장엽 씨가 크게 고마워 했다. “나는 하루에 식사는 오후 늦은 점심과 이른 저녁을 겸해 한끼로 때우고 아침 식사는 반드시 곶감 3개로 때운다”는 것이었다. 김현희 씨는 “그렇게 하고 계시다는 말씀을 들어서 곶감을 들고 왔다”고 황장엽 씨의 말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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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은 습관인것 같습니다
국민장을 보고 나서요
어떤 해후
남몰래 흐르는 눈물
여보와 당신의 차이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