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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則 / 現實은
 

작성자 정계영 글번호 301
홈페이지 메 일 ynsseoul@hanmail.net
작성일 2011-02-18 10:24:40 조 회 9758

원칙과 현실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자기의 언행에 원칙을 세워놓고 그대로 실천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나, 자기가 한 약속을 어김없이 지키는 것은 아주 중요하고 좋은 일임에 틀림없다. 따라서 그렇게 원칙을 지키고 약속을 지키면서 살아가는 사람은 대체로 다른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는다. 일반인의 경우에도 자기가 세운 원칙과 자기가 한 약속을 반드시 지킨다는 것이 중요한 덕목일진대, 사회의 지도층 인사에 있어서야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지난 반세기 이상 원칙을 지키지 않고, 약속을 지키지 않는 사회지도층이나 정치인들을 수 없이 보아왔기에, 특히 이런 점에 민감하다고 하겠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의 정치인 중에는 원칙과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정치인들을 많이 볼 수 있고, 그런 정치인들은 대체로 국민들의 높은 지지를 받고 있다.

 

그러나, 비록 그렇더라도, 그 원칙과 약속을 지키는 것이 많은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게 될 것이 예상되는 경우에도 원칙과 약속이라고 해서 반드시 지켜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 원칙과 약속에 관하여 임진왜란 때의 이순신과 원균의 행태를 비교하여 본다.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으로 이순신은 국가와 민족을 구한 불멸의 성웅(聖雄)이며, 원균은 그런 이순신을 모함했던 간신으로서, 왜적에게 패하여 조선의 수군(水軍)을 전멸시킨 무능한 졸장이다.

 

그러나 뒤집어보면, 원균은 원칙과 약속을 지켰던 사람이었고, 이순신은 원칙과 약속을 어겼던 사람인 것이다. 조선시대 당시에 신하된 사람은 반드시 왕명을 지켜야 하는 것이 원칙이고 약속이었다.

 

우리는 조선의 수군을 전멸로 이끌었던 결과만을 보고 원균을 졸장(拙將)에, 간신으로 매도하고 있지는 않을까? 임진왜란이 끝난 후, 조정으로부터 이순신, 권율과 함께 1등공신으로 봉해졌던 원균이다. 청년시절부터 수십 년간 북방에서 여진족들과 싸우면서 “늘 이기는 장수(常勝將軍)”로서 조선의 국경을 지켰던 용감한 장군이 바로 원균이었다. 그랬기에 조선의 조정에서는 왜적이 쳐들어 올 것으로 예상되던 임진왜란 직전에 원균을 왜적의 수군과 맨 처음 부딪치게 되는 경상우수사(慶尙右水使)에 임명했던 것이다. 그러나 원균의 용맹은 북방의 여진족과의 전투에서만 빛을 발했을 뿐, 왜적 수군과의 싸움에서는 전혀 발휘되지 못하고 말았다.

원균이 수사(水使)로 임명되었던 경상우수영은 당시 조선 최대의 수군 본부였다. 경상우수영이 보유한 전함은 이순신의 전라좌수영보다 배나 많았다. 그러나 원균은 이렇게 막강한 수군을 가졌으면서도 왜적의 침입을 방어하지 못하고 수백 척의 전함을 스스로 불태우고 도망치고 말았다.

 

임진란 개전 당시 왜적 수군의 함선은 단순히 군사나 물자를 해상을 통하여 운반하기 위한 수단의 수송선...그것이 전부였다. 많은 군사와 물자를 바다를 건너서 빨리 수송하기 위하여 덩치 크고 속도가 좀 빠른 정도였던 것이다.

거기다가 적에게 겁을 주기 위해서였는지, 더 크게 보이게 하려는 목적에서였는지 배 위에 누각(樓閣)같은 것을 만들어 올리고 무당집 같이 알록달록한 깃발을 무수히 꽂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왜국의 지도자(풍신수길)는 육상전투에만 신경을 썼는지, 수군의 함선에는 대포를 장착하지 않았다. 소총과 대포는 서양으로부터 거의 동시대에 전래된 것으로서 중국과 조선에서는 대포를, 일본은 소총(鳥銃)을 선호하였던 까닭이다. 그와는 달리 조선 수군의 주력함은 판옥선(板屋船)이란 것으로서 원양으로 나가기에는 부적합했고, 속도는 좀 느렸지만 근해에서의 활동이 편한 배로서 선체의 두께가 두껍고 단단했으며 해상 전투에서 필수인 대포를 장착하고 있었다.

 

임진왜란 당시에 조선의 수군이 적을 상대하는 방법으로 당파작전이란 것이 있었는데, 이는 두께가 두껍고 단단하며 대포까지 장착한 조선의 판옥선으로 왜적의 군함을 들이받아 깨트려 침몰시키는 것으로 난중일기에도 자주 등장하는 작전이다. 조선의 수군은 원거리에서 대포로 적함을 공격하고, 근접전에서는 당파작전을 썼던 것인데, 당파작전에서의 승리는 조선의 군함이 왜적의 군함보다 튼튼하였기 때문인 것이다.

 

왜군의 2차 침략인 정유재란(丁酉再亂)때, 왜의 수군은 바다에서의 열세를 만회하고자 비로소 수군다운 수군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배에 당시 해상전투의 세계 최강국이던 포루투갈의 대포도 장착했고, 배의 크기나 두께도 조선수군의 주력함인 판옥선과 견줄 만 하게 보강을 하였으며, 거기에 함선의 숫자까지도 조선수군에 비하여 월등히 많았다

정유재란에 출현한 이러한 왜적의 군함을 보고 정면대응을 해서는 승산이 희박하다고 판단한 이순신장군은 숫자가 많고 무장이 잘 된 적을 때려 부술 전술을 구사하는데, 매복전술 아니면 기습작전으로 일거에 섬멸한다...그런 전략이었다. 그렇기에 이순신장군은 왜 수군의 본거지인 부산포로 진격하여 왜 수군의 본영을 때려 부수라는...전장의 현실을 모르는 선조 및 조정의 명령을 거부하였다.

 

당시 조선 조정이 이순신에게 내린 부산포 공격 명령이란, 거센 역 해류와 역풍을 맞아가면서 병사들이 죽어라 노를 젓도록 하여 1차 침입 때와는 비교도 안 되게 강력한 무장을 한 왜의 수군이 버티고 있는 바다로 나아간 다음, 곳곳에 포진해 있는 숫적으로도 우세인 왜의 수군과 싸워가며 왜 수군의 본영인 부산포로 돌격하라는 명령이었는데, 이는 남해바다의 현실과, 전과 다른 왜 수군의 위상을 잘 아는 이순신의 입장에서 볼 때 "나가서 전멸 당하라"는 명령일 뿐이었다. 따라서 이순신은 왕명을 어기면서도 부산포로의 출격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당시 조선 수군과 육군의 총사령관인 권율 도원수는 이순신에게 곤장까지 때리면서 부산포로 진격할 것을 명했으나 이순신은 이를 따르지 않았다.

이순신의 조정의 명령 거부는 곧 반역이며 적과의 내통이라는 오해를 받게 되어, 이순신은 한양으로 압송당하여 매질로 뼈가 드러나는 국문을 받은 후 관직을 삭탈 당하게 된다.

 

이순신의 후임으로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사람이 바로 원균이다. 임진왜란 개전 초기에 150척에 달하는 함대 전부를 스스로 불태우고 달랑 4척의 전함만 챙겨 도망쳤던 까닭으로 혼자서는 부산앞바다를 가득 메운 왜 수군과 싸워 이길 수 없어 당시 전라좌수사였던 이순신에게 연합해서 왜 수군을 상대하자고 요청했다. 이순신은 "각 도의 수군은 경계가 있다"며 듣지 아니하고 "조정의 명령이 있어야만 움직이겠다" 말하였고, 마침내 조정의 명령이 떨어졌을 때 비로소 원균의 병력과 합쳐서 왜적과 싸워 크게 이겼으니, 이것이 바로 임진왜란 최초의 승전인 “옥포해전”이다.

그 후로도 원균은 이순신의 전라좌수영 수군에 빌붙어 왜적과 싸웠고, 이순신 장군 덕에 계속 왜적의 수군을 죽이는 작은 공들을 세울 수 있었으나, 해전의 전술은 개뿔도 모르면서 항상 왜적의 본거지를 공략하자고 주장하고, 뒤로는 조정으로 사람을 보내어 자기가 이순신보다 훨씬 더 유능한 사람이고, 자기가 삼도수군통제사가 되면 당장에 조선의 바다에서 왜적의 수군을 섬멸할 수 있다고 선전했다. 마침내 이순신의 후임으로 "삼도수군통제사"에 오른 이러한 원균에게도 조정은 부산포의 왜 수군 본거지를 때려 부수라는 원정 출정 명령을 내렸다.

 

비록 후세에는 졸장으로 알려지고 있지만, 그래도 원균은 백전의 노련한 장수, 계절풍에 의한 거센 역풍과 역 해류와 거친 역 파도를 병사들이 죽어라 노를 저어 헤치면서 장거리를 거슬러 부산포에 가 싸우라는 조정의 명령이란 전장의 현실을 모르는 답답하기 그지없는 명령이며, 이는 "나가서 개죽음 당하라는 명령"이라는 것을 원균도 분명히 판단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때 원균이 이순신처럼 조정의 무모한 명령을 거절했으면 오늘날 원균은 이렇게 욕을 먹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전장에서 상부의 명령을 거부하는 것은 곧 반역이다. 더구나 군주 국가였던 그 당시 군주의 명령은 하늘의 명령으로서 아무리 부당한 명령이라도 신하는 거역할 수가 없었는데, 조정의 명령에 따라 자멸을 하느냐...아니면 명령을 거부하여 조선수군을 살리느냐 사이에서 원균도 많은 고민했을 것이다.

 

전쟁터의 현실과 직면한 장수로서의 자세와, "임금의 명령은 하늘의 명령이다"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원균은 임금의 명령을 따르게 되었을 것이고, 거센 역풍과 세찬 역해류가 흐르는 바다를 병사들로 하여금 죽어라 노를 젓도록 하여 거슬러 부산포로 가다가 경남 거제도 칠천량에서 매복해 있던 대규모 왜 수군에게 제대로 힘 한번 써보지 못하고 패하게 되어 비참하게 최후를 맞게 되었다. 이것이 오늘날 원균이 간신, 무능력자의 표상이 된 원인일 것이다.

 

이순신은 전쟁터 지휘관으로서 전쟁터의 현실을 알기에 조정의 명령을 거부하여 오늘날 성웅과 영웅이 된 것이며, 원균도 전쟁터 지휘관으로서 전쟁터의 현실을 알지만 "임명자 주군의 명령은 하늘의 명령이다"에 충실하였기에 오늘날 "무능력한 간신이다"로 왜곡 되어진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원칙과 현실, 참으로 선택이 어려운 문제인 것 같다. 그러나 역사는 말해주고 있다. 현실을 감안하지 못하는 원칙의 고수는 안 되는 것임을 저 임진왜란 때의 이순신과 원균이 웅변으로 말해 준다.

☞ [출처] 동기생 카페에서 옮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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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則 / 現實은
日本을 눈여겨 봐야 하기에
오냐 그래도 잘 살아냈다~그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