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전깃불도 없는 산골 마을에서 꿈을 키운 GE코리아 이채욱
회장
삼고초려를 마다하지 않고 인재를 영입하는 데 최선을 다한다
▣ 김영배 기자 kimyb@hani.co.kr
발명왕 에디슨에서 비롯된 회사, 1896년 ‘다우존스 산업지수’에 처음 포함된
미국의 12개 우량 기업 중 지금까지 살아 있는 유일한 상장회사, 시장가치 기준
세계 최대(4천억달러) 기업, 영국 <파이낸셜 타임스>와 미국 <포천> 선정
‘세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기업’ 1위…. 제너럴일렉트릭(GE) 앞에 붙는 수식어는
다양하고 화려하다.
입주 과외와 장학금으로 학업 마치다
GE코리아의 최고경영자인 이채욱(59) 회장은 이런 위풍당당한 세계 최대 다국적
기업의 이미지보다는 옆집 아저씨 같은 풍모다. 1970년대 후반까지 전깃불이
들어오지 않을 정도의 산골(경북 상주 오대리)을 고향으로 둔 태생의 흔적은 끝내
지울 수 없는 모양이다. “결혼한 뒤까지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밤에 화장실
가려면 초롱불을 들어야 했습니다. (나를 쳐다보며) 초롱불을 알려나? 시골 다니러
가면 집사람이 난감해했지요. 초롱불 주위만 동그랗게 빛이 드니 켜놓기도 그렇고
안 켜놓을 수도 없고, 하하.”
그 시절 농사짓는 집들이 다 그랬듯, 그의 집안도 고등학교 보내는 게 힘든
형편이었다. 시험을 거쳐 장학생으로 고교(상주고)에 어렵사리 입학했지만, 한해만
다니고 그만둬야 했다. 2학년 올라가며 치른 장학생 시험에서 떨어졌기 때문이다.
그렇게 1학년을 마치고 집에서 농사를 짓던 그는 뜻밖의 도움으로 학업을 이어가게
된다.
“내가 17살 때였으니까, 1961년일 겁니다. 날짜도 안 잊어버려요. 6월6일
현충일이었거든요. 중학교(상주 남산) 시절의 교장선생님(황의복)께서 내가 학교에
안 나온 걸 듣고선 사정을 알아봤던 모양입니다. ‘마침 적십자병원 원장이 가정
교사를 구한다고 하니 입주 과외를 하면서 학교는 계속 다니도록 해라’고
하시더군요. 병원에서 보내준 앰뷸런스를 타고 그 집에 가던 기억이 납니다.”
입주 가정 교사를 하면서 면서기 시험을 준비하던 그를 대학으로 이끈 이도 당시
교장선생님이었다고 한다. 영남대에서 4년 장학생을 뽑는다며 시험에 응해보라고
권했던 것이다. 그렇게 시험을 봐서 뽑힌 법학과 3명 가운데 그는 꼴찌(?)로
합격해 학비 걱정 없이 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
군 제대 뒤 4학년에 복학한 그는 사법고시 꿈은 일찌감치 접게 된다. 입주 과외로
생활을 꾸려가야 할 그로선 제대로 공부할 틈을 내기 어려웠다. 베트남 전쟁 때
파병돼 십자성부대 헌병으로 13개월 동안 복무하며 다달이 받은 50달러(당시
환율로 한화 1만5천원) 가운데 일부를 저축해두긴 했어도 가정교사직은 이어가야
했다. 이렇게 사법고시 꿈이 꺾인 게 삼성물산 입사로 이어지고, 훗날 세계적인
기업의 경영진 반열에 오르는 계기가 됐으니 새옹지마라고 해야 할까.
대학 졸업 직후인 1972년 삼성물산에 들어간 그는 주로 해외사업쪽을 맡았다. 때는
바야흐로 ‘수출만이 살길’이라는 국가적인 구호에 힘입어 삼성물산을 비롯한
종합상사가 맹렬하게 뻗어나가던 시기였다. 입사 13년 만인 1985년 부사장급인
해외사업 본부장에 오른 데서 이런 사정을 엿볼 수 있다.
종합상사맨을 천직으로 알고 있던 그가 GE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공교롭게도 재벌
회사의 독특하고 비정상적인 인사 스타일에서 비롯됐다. 올림픽을 치른 1988년 말
삼성 본관에서 송년회가 열린 직후 이필곤 당시 사장과 따로 만나 차를 마시는
자리에서 갑자기 GE(당시 삼성GE의료기기)쪽으로 갈 것을 권유받으면서 인생
항로가 크게 바뀌었다.
쓰러져가던 삼성GE를 일으킨 비결
“사실 그때만 해도 삼성과 GE의 합작회사가 있는 줄도 몰랐어요. 각 사업 부문을
여기저기 다니며 소주를 꽤 마셨는데, (다른 데로 가라고 하니) 술이 확
깨더군요.” 사장의 언질 뒤 해가 바뀌고 나흘이 지나도록 꿩 구워먹은 소식이더니
아뿔싸! 그 다음날 신문에 합작회사 대표로 전격 발령이 나는 것이었다. “의료의
‘의’자, 메디컬의 M자도 모르는 사람”의 의료기기 회사 경영은 이렇게 황망하게
시작됐다.
삼성GE의료기기 대표 자리가 마뜩잖은 이유는 잘 모르는 분야인데다 회사 형편도
마땅치 않았기 때문이다. 삼성과 GE라는 한·미 최고 기업 사이의 합작사업이라는
명성에 어울리지 않게 설립 뒤 7년 연속 적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터였다.
삼성GE의료기기 경영을 맡아 회사 진단을 벌인 끝에 그가 내린 결론은 X-레이 기기
등 고가품을 소량 생산하는 방식이 우리 실정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고가품을 개발하기보다는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 방식으로 우선은 수지를
맞추는 데 주력했다. 수원 삼성단지 내 땅을 팔고 인원을 줄이는 구조조정은
필연적인 절차였다. 인원 감축 폭은 전체 직원의 30~40%에 이르는 100여명에
이르렀다. 삼성그룹 계열사로 재취업 길이 열려 있어 큰 말썽 없이 인원을 줄일 수
있었던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이때 그를 많이 도와줬던 이가 김순택 삼성SDI
사장(당시 제일합섬 상무·회장 비서실 파견)이었다. “그때 그런 조처를 하지
않았다면 지금 회사는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라고 이 회장은 회고한다.
기우뚱거리는 회사를 일단 추스른 뒤 우선 내세운 카드는 ‘10%+3분의 1’
원칙이었다. 구조조정 뒤 남은 직원들에게 ‘봉급은 무조건 삼성보다 10%를 더
주고, 목표 초과액의 3분의 1은 성과급으로 지급한다’는 내용이었다. 회사에는
활기가 흘렀다. 그가 경영을 맡은 뒤 연평균 45%의 고성장세를 지속적으로 이어간
것은 이런 데 힘입은 바 컸던 것으로 풀이된다.
이 회장은 자신의 강점을 “내가 잘 모른다는 사실을 안다는 것”이라고
알쏭달쏭하게 말했다. “기술, 판매를 잘 모르니 잘 아는 사람(인재)을 영입하는
데 최선을 다했던 것”이란 추가 설명에 이어 일화를 전해듣고선 그럴듯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1990년대 후반 GE초음파 사업부문 아시아 지역 사장(싱가포르
주재)으로 재직하면서 마케팅 전문가를 끌어들인 과정이 한 예. 마케팅 분야의
최고를 끌어들이기 위해 그는 먼저 고객인 의사들을 만나면서 ‘누가 최고의
마케터냐’고 묻고 다니는 일로 ‘작업’을 시작했다. 입소문으로 들은 결과 가장
많이 거론된 이는 경쟁회사의 책임자인 덕시 데이비스라는 미국인이었다. 처음
만난 지 10분 만에 ‘필’이 꽂혀 스카우트를 제의했다가 보기 좋게 퇴짜를
맞았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맹장염으로 입원한 그를 병원까지 찾아가고, 퇴원
뒤 집에까지 가서 결국 스카우트를 성사시켰다. “무작정 찾아가거나 돈을 많이
제시해서 성공한 게 아니라 회사에 들어온 뒤 ‘잘하면 그 다음 좋은 자리로 갈 수
있다’는 비전을 제시했기 때문이다”라고 한다. 이 회장은 “(인터뷰 때 자리를
같이 한 조병렬 이사를 가리키며) 저 사람도 그렇게 영입한 것”이라며 웃었다.
윤리 경영 “신문에 나도 될 일이냐”
삼성물산 재직 16년에 이어 GE로 옮겨서도 꼭 16년 동안 재직 중인 이 회장은 국내
기업과 외국계 회사의 가장 큰 차이로 의사결정 과정과 결정 뒤의 집행 방식을
꼽는다. “외국계 회사의 경우 의사결정을 할 때까지는 상하 격의 없이 자유롭게
얘기하지만, 결정 뒤엔 굉장히 강하게 드라이브(집행)합니다. 이때는 다른 의견을
낸 이들도 군말 없이 따릅니다. 자기와 다른 의견으로 최종 결정되면, 좋은 걸
배웠다고 흔쾌히 받아들입니다.”
이 회장은 여기에 덧붙여 GE만의 독특한 ‘윤리경영’을 강조한다. 그는 GE
본사에서 제시한 세세한 윤리 지침을 나름대로 이렇게 요약한다. “지금 하는 일이
신문에 나도 괜찮은지 반문해봐라.” 신문에 나서 안 될 일이라면 당장 회사
이익으로 이어질 행위라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이른바 ‘뉴스페이퍼 테스트’다.
이렇게 윤리경영을 강조하는 그도 뜨끔한 일을 한번 당했다고 한다. 지난번 미국에
가야 할 조병렬 이사를 급한 일로 잠깐 붙잡아뒀다가 비행기 표를 새로 구해야 할
때였다. 그는 별 생각 없이 항공엔진 담당 스티브에게 비행기 표를 급하게 좀
알아봐달라고 부탁했다가 “윤리 규정 위반일 것 같은데, (항공사에) 부탁해도
괜찮겠느냐”는 답변을 듣고 화들짝 놀라 바로 철회했다.
그는 2002년 5월 GE의 한국 사업을 총괄하는 GE코리아 사장을 맡은 데 이어 올 5월
회장으로 승진했다. 인터뷰 뒤, 사진 촬영을 맡은 박승화 기자에게 ‘사진(촬영
기술)을 배우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묻는 그의 눈은 호기심으로
반짝거렸다. ‘꿈이 뭐냐’는 질문은 굳이 필요해 보이지 않았다.


고종의 침실에 들어온 GE
1887년부터 시작된
한국과의 인연, 첨단 기술 및 금융분야 진출
한국과 GE의 인연은 1887년부터 시작됐다. 그해 3월(음력 2월) 고종과 왕비의
침전이던 경복궁의 건청궁(乾淸宮)에 한국 처음으로 전등불이 켜졌는데, 이 전등이
바로 GE의 전신인 에디슨 전등회사에서 들여온 것이었다.
GE는 1976년 한국 현지 법인인 GE인터내셔널코리아를 출범시켜 발전설비, 항공기
엔진, 산업설비 분야에서 사업을 펼치기 시작했으며 1984년 GE삼성의료기기(현
GE메디컬코리아), 1987년 GE플라스틱, 1996년 GE가전서비스 및 GE캐피털코리아를
설립하는 등 30년 동안 첨단 기술 및 금융 분야의 상품과 서비스를 공급하고 있다.
가전, 항공기 엔진 및 발전설비의 완제품과 부품을 한국 기업들로부터 조달하고
있기도 하다.
지난해 말 기준 GE의 총매출액은 1524억달러, 순이익은 166억달러에 이른다.
종업원은 31만5천명 수준이다. GE는 한국에 총괄 조직인 GE코리아를 비롯해 20여개
계열사와 1400명의 임직원을 두고, 한해 15억달러(1조5천억원)의 매출을 올리고
있다. GE의 최고경영자는 제프리 이멜트(49) 회장. 강력한 구조조정으로
‘중성자탄 잭’으로 불리던 잭 웰치로부터 2001년 바통을
이어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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