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은근한 진지함을 품고, 찬찬히 읽어내려가는 게 좋겠다. 그런 다음에야,
거대한 서사와 무의미한 일상 사이를 날카롭게 비집고 들어간 이 여섯 권의 책을
온전히 음미할 수 있다.
<20세기 한국민중의 구술자서전>은 기왕의 어떤
역사서와도 구분되는 독특한 그릇에 지난 한 세기를 담았다. 일흔을 넘긴 20명의
‘필부’들이 자신의 삶을 ‘구술’한 내용을 그대로 실었다. 토씨 하나, 몸짓
하나도 놓치지 않고 사투리까지 그대로 ‘녹취’해 옮겼다. 그렇게 풀어낸 각자의
삶은 기왕의 역사가 놓치거나 소흘히 다룬 ‘생동하는 시공간’을 재현한다.
특정한 역사관으로 이들의 주름진 삶을 모두 설명할 수는 없지만, 따지고 보면
현실의 풍부하고도 복잡한 실체를 있는 그대로 보듬고 있는 그들의 이야기가 참된
‘민중의 역사’다.
예컨대 이런 대목이다. 일제시대 대구경찰서 순사부장으로
‘좋은 시절을 보냈던’ 아무개씨는 일왕의 항복선언을 듣고 변두리 비탈길에
올라가 ‘조선독립 만세’를 외쳤다. 광복 직후 경위로 승진해 대구경찰서
보안주임이 된 그는 이른바 ‘대구 10월 사태’의 현장에서 좌익 군중과 맞섰다.
‘좌익이 싫어 이승만 박사를 지지했던’ 그는 그러나 막상 좌익과의 전면전이
벌어지기 직전인 1948년 ‘거러지(거지)가 많아 고아원을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돌연 경찰을 그만두고 고아원을 열었다.
이런 삶은 또 어떤가. 해방 정국에서
지서 습격을 이끈 좌익 청년이었고 한국전쟁 때는 공산당의 면당위원장까지 지낸
아무개씨는 붙잡힌 우익청년단원들을 (죽이지 않고) 풀어준 ‘덕분’에 지금껏
남쪽에서 농사지으며 ‘평범하게’ 살고 있다. 동료의 이름을 발설하지 않으려고
모진 고문을 견디다 어깨가 으스러진 그에게 좌·우익간 ‘살상’은 흘러간 추억일
뿐이다. 몇차례 죽을 고비를 넘겼지만 ‘조용한 삶’을 택한 그는 지금
새만금사업을 찬성하는 늙은 농꾼이다.
이런 ‘민중’들의 삶을 설명하고
이해하는 것이 역사학, 나아가 인문사회과학하는 이들의 과제라면, 한국 학계는
<20세기 한국민중의 구술자서전>을 통해 비로소 하나의 가닥을 잡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일상에서 벌어진 민중의 역사
구술사는 근대 역사학이
비추지 못한 외진 곳을 중심으로 역사를 재구성하려는 노력이다. 국가나 왕조가
아닌 민중의 시각에서, 권력자나 명망가가 아닌 소수자의 시각에서, 공식문서나
문헌이 아닌 일반인의 기억을 토대로, 거대한 사건이 아니라 일상의 소소한 일을
바탕으로 역사를 쓰려는 노력이다.
유럽과 미국을 중심으로 ‘발흥’한 이런
접근은 거대 서사를 중심으로 한 근대에 대한 비판에서 시작됐다. 당연히
포스트모더니즘 역사학에 영향받은 바 크다. 문제는 서구의 ‘탈근대’ 역사학이
한국에서는 특정 소재의 문화사를 다룬 ‘××의 역사’류의 번역물로 대체되거나,
‘그 시절도 그리 나쁘지 않았다’ 류의 일제시대 문화사에서 그치는 경우가
많았다는 점이다. 덕분에 탈근대 역사학의 근본적 문제의식인 ‘권력과 거대
서사로부터 소외된 민중의 관점’은 사라지고, 오히려 민중사관을 비판하는 우익적
이데올로기로 변모해 버리기도 했다.
<20세기 한국민중의 구술자서전>은 그런
점에서 서구에서 비롯된 탈근대의 문제의식을 한국적으로 잘 소화해낸 역작이라 할
만하다. 어민·상인·노동자·농민·이주민 등으로 구분해 말 그대로 ‘이름없는’
이들의 기억을 통해 굴곡많았던 한국 현대사를 짚어간다. 80년대 노동운동에
초석을 놓은 동일방직의 여성노동자, 고속성장의 산 증인이라 할만한 포항제철의
노동자, 개항과 근대화의 숨가빴던 현장인 인천항에서 평생을 보낸 목수,
노점상으로 살아온 남대문 시장 상인, 식민지 조선을 안온한 추억으로 떠올리는
일본인, 조국을 잃고 또다른 조국을 찾아온 화교 등이 그 역사의 주인공이다.
각자의 이야기는 다르지만, 공통점은 있다. 자신들의 10대와 20대를 물들였던
식민지배와 좌우대립, 그리고 한국전쟁에 대해 이들은 ‘강렬한’ 기억을 갖고
있다. 아흔을 바라보는 노인들이지만, 이들의 삶은 1930년대 또는 1950년대
언저리에서 생동한다. 덕분에 이름없는 그들의 후손인 이름없는 우리들은 거대
서사가 충분히 말해주지 못한 현대사의 가장 중대한 대목을 어느 때보다 풍부하게
접할 수 있게 됐다.
구술사의 진전, 인문학 활력소
시각을 좁혀
구술사라는 관점에서만 봐도, 이번 연구는 의미깊은 진전이다. 한국에서 ‘민중적
관점’의 구술사에 대한 관심이 시작된 것은 1980년대다. 도서출판 뿌리깊은
나무에서 출간했던 민중들의 구술생애사를 비롯해 <역사비평>의 현대사 증언
시리즈가 대표적이다. 90년대 들어서는 현대사의 특정 사건을 집중적으로 드러내는
유력한 방법으로 구술사가 등장했다. 제주 4·3연구소나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전남대 5·18연구소 등은 이 분야에서 꾸준한 진전을
이뤄왔다. 최근에는 국사편찬위원회에서도 현대사 구술 채록을 지원하고 있다.
문제는 ‘방법론’으로서의 구술사가 여전히 ‘실험적’이거나 ‘보완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점이다. <20세기 한국민중의 구술자서전>은 그동안 다소 산만하게
진행됐던 구술사 연구 방법론의 체계를 잡으려는 뜻을 담고 있다. 1-5권까지를
어민편, 노동자편, 상인편, 농민편, 이주민편으로 묶은 것은 ‘개인’의 기억이
‘계층 및 집단의 기억’과 어떻게 만날 수 있을지를 모색하는 노력으로 평가된다.
전북 김제지역 사람들의 구술사를 다룬 6권도 특정 공간과 시간을 공유하는 이들의
기억을 재구성해 ‘마을사’를 써보려는 의도를 담고 있다.
이 책은 침체에 빠진
한국 인문학에 전혀 새로운 활력과 출구를 마련하는 계기라는 점에서도 주목된다.
지난 2002년 7월부터 이 방대한 작업을 시작한 ‘20세기 민중생활사연구단’(단장
박현수 영남대 교수)은 인류학·철학·문학·사회학·역사학·정치학 등의
연구자들이 두루 참여했다. 연구과정 자체가 학제 구분을 넘어선 데다, 연구성과도
다시 각 학문 분과로 퍼져갈 것을 의도하고 있다. 나아가 문학과 영상 등
예술활동의 소재로 활용할 수 있다는 점을 연구진 스스로 강조하기도 한다. 사실은
이 여섯 권의 책을 읽는 것 자체가 때로 낄낄거리며 웃다, 때로 가슴이
먹먹해지면서, 다음 장면을 기다리지 않을 수 없는, 흥미진진한 영화 수십편을
보는 듯한 느낌이다. 이런 걸 일러, ‘삶’이 주는 감동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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