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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의 영광을 위한 이 참혹한 죽음을---
 

작성자 윤종대 글번호 53
홈페이지 메 일 jdyoonddd@hanmail.net
작성일 2003-04-15 21:48:15 조 회 10199

작년에 110억원이라는 천문학적 제작비를 투입한 블록버스터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이라는 영화가 전국 관객 20여만으로
거의 재앙적 흥행참패를 했다하여 얘기거리가 되는 가운데
“가문의 영광”이라는 영화는 500만 관객을 넘어 작년의 “친구”에 필적한다고 하는데---, 영화 이야기를 하자는게 아니고 가문의 영광을 지키기 위한 이 참혹한 이야기를----.

일본의 무로마치막부(室町幕府)시대의 쇼군(將軍) 아시카가 요시미쓰
(足利義滿)가 천하를 통치하고 있을때 쇼군에 반역 했다는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성인남자 전원 할복이라는 멸문지화를 당한 가가(加賀) 지방의 마에다번(前田燔)의 30만석의 다이묘(大名) 고니시 슌스께의 직계 자손인 고노 슌쓰께 라는 한 사무라이가 살고 있었는데 젊은 아내는 귀여운
아들하나 만을 남기고 일찌기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이 사무라이는 궁핍한 생활 가운데서도 오직 가문을 부흥 시키고 옛날 그 찬란했던 가문의 영광을 되찾기 위하여 절치부심, 참고 기다리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이 사무라이 가 어느날 출타했다 돌아와 보니 벌써 7살이나 된 아들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좀 걱정이 되어 골목안을 기웃거리는데 마침 아들이 나타났습니다.그런데 아이를 보니 조금 이상 합니다. 누구에게 맞았는지 얼굴이 좀 부은 것 같고 다리도 약간 저는 것 같읍니다.그래서 이유를 물었으나 한사코 대답을 하지 않아 엄하게 닥달을 하니--

동네 어귀에 제법 큰 떡집이 있는데 이 가게의 주인은 원래
상인 출신으로 이재에 밝아 수만금의 재산을 모아 이 지방에서
유지 노릇하는 자였는데 수전노로 호가 났으며 또 고리대금업으로
인근 주민의 고혈을 빨아 많은 빈축을 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게의 좌판에 쌓아놓은 큰 만두가 몇 개 없어졌다고
아이를 의심하여 붙잡아다 마구 족친 것이 었습니다. 아이로부터
자초지종을 들은 사무라이는 아이가 자기를 속일리 없다고 판단하고
그 가게를 찾아 주인을 불러 내었습니다.

현재는 몰락했으나 그래도 예전에는 당당한
마에다가문의 사무라이이니 가게앞에 나와 섰습니다.
그는 찾아온 이유를 설명하고 자기아이에게 도둑의 혐의를
씌우고 때린 행위에 대해서 사과를 요구했습니다.

가게주인은 비록 증거는 없지만 틀림없이 가난한 사무라이의
아이가 배가 고파 만두를 훔쳐 먹었다고 확신하고 속으로는
코웃음을 쳤으나 사무라이라는 계급적 권위와 슌쓰께의 위엄에 눌려
아무소리 못하고 가만히 서 있었습니다.

상대가 아무 말이 없고 또 고분고분한 자세를 보이자 더 이상
일을 확대하고 싶지 않아 사무라이는 그만 돌아 섰습니다.
그런데 이 가게주인은 돌아서는 사무라이의 등뒤에서 들릴락
말락한 낮은 소리로 한마디 한 것이었습니다..

“도둑질하는 사무라이새끼 놈을 키우는 주제에- ,하루 한끼
밥도 제대로 못 사 먹는 거지같은 놈들이-- ,“ 그러나 이 낮은
중얼거림을 돌아서던 사무라이가 그만 들은 것이었습니다.

곧이어 가게앞에 이 사무라이가 그 아들을 데리고 나타나서
주인을 다시 불러내었습니다. 가게주인과 마주선 사무라이와의
기묘한 대치에 떡을 사던 사람들과 지나가던 행인들이
슬금슬금 모여들었습니다.

“그대는 아무런 증거도 없이 우리 마에다가문의 명예를 훼손했다“
나지막하나 폐부를 찌르는 이 한마디가 끝나기도 전에 허리에
찬 대도를 뽑아 마에다 가문의 전승검법 비천어검류 (飛天御劍流)
의 절기(絶技)인 수평베기로 옆에 서 있던 이 세상의 일점 혈육이자
가문의 계승자인 아들을 한 칼에 일도양단한 것이었습니다.

이어 넘어진 아이의 배를 가르고 내장속에 만두의 내용물이
없음을 가게주인의 코앞에서 확인 시켜준뒤 이미 얼굴은
사색이 되어 몸 전체로 와들와들 떠는 가게주인의 목을
그대로 친 것이었습니다.

가을의 태양빛이 찬연한 백주의 저자거리에서 일어난 이 참극에
수많은 전란속에서 살아온 구경꾼들조차 악연히 놀라 숨소리도
못내고 있는데 무표정한 얼굴로 이 사무라이는 자기의 윗도리를
벗어 아들의 시신을 수습하여 자기집으로 향했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그는 아이의 시신을 자기 초막의 다다미위에
누인 다음 곧 뒤뜰의 조상을 모신 사당에서 지금까지의 일을
고하고 집에 불을 지른 후에 다다미 위의 아들의 시신옆에서
단정히 앉아 할복을 하고 젊은 무사의 생을 추호의 미련도
없이 마감한 것이었습니다.

훗날 이 이야기를 들은 쇼군은 그의 충절을 기려 그의 가문을
복권시키고 가장 가까운 친척중에서 아들을 골라 양자로 입양시켜
가문을 이어가게 했다고 합니다.

사무라이의 명예와 가문의 영광을 그 티끌같은 불명예에서조차
구하기위한 증거를 얻기위해서 그 사랑하던 자기의 아이를
망설임없이 베어버리고 할복해버린 이 무정한 사무라이에게는
가문의 명예 이상의 그 무엇은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고나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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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골소년의 사랑이야기
우리 서로 사(査) ,돈(頓)을 해봅시다.
가문의 영광을 위한 이 참혹한 죽음을---
이 승우씨 고군분투하시는데-----
봄 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