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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계인의 ‘세계 속 개인’ 성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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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날짜 : 2006-09-09
[한겨레 2006-09-08 15:15]    

[한겨레] 나는 이렇게 읽었다/사람 잡는 정체성

이라크 파병 논란이 한창일 때 나는 우리가 그 세계를 모른다는 이유로 반대했다. 한국 내 이슬람 문화연구자나 아랍어 전공자 같은 전문가는 물론이고 대중적인 동호회까지 끌어 모아도 극히 소수일텐데, 이렇게 아는 것이 없는 나라의 일에 하필이면 파병이라는 방식으로 개입한다는 것이 너무나 위험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비록 왜곡되거나 일천하다 해도 서유럽이나 미국에 대한 이해와 비교하면 아랍 세계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흰 도화지 상태나 다름없다 할 것이다.

그 뿐인가, 우리는 서구의 눈으로 아랍 세계를 받아들이지 않았던가. 십자군은 종교적 신념과는 무관했고 어린이를 노예로 팔아넘겼으며, 심지어 같은 기독교 제국을 파괴하기도 했다. 부시는 이라크 전쟁을 ‘십자군 원정’에 비유하면서 역사 공부에 게을렀음을 드러냈지만 일말의 진실도 함께 밝힌 셈이다. 미국 군대는 진정한 의미의 십자군이니 말이다!

그들의 역사 왜곡보다 ‘우리 안의 오리엔탈리즘’이 더 문제이다. 우리는 대개 잘 모르는 대상을 신비화하거나 괴물로 만든다. 모르면서 배우려 하지 않고, 알지 못하니 이해도 못 한다. 대상을 모르는 상태로 두는 것은 몹시 불편하다. 신으로 만들어 숭배하거나 괴물로 만들어 쳐부수어야 편해진다. 헐리우드가 지치지도 않고 생산해내는 각종 괴물들은 자아가 인정할 수 없는 자신의 추한 면이 투사된 존재이다. 괴물은 광야로 쫓아내거나 파멸시켜야 한다. 나는 나의 더럽고 어두운 점과 함께 살 수 없기 때문이다.

레바논에서 태어나 프랑스 국적자로 살고 있는 아민 말루프는 『사람 잡는 정체성』(이론과실천, 2006)에서 왜 민족이나 종교, 인종 같은 정체성의 이름으로 전쟁이 벌어지고 인류의 고통이 끊이지 않는지 묻고 있다. 저자 자신의 다양한 ‘정체적’ 배경과 현재 지구촌에서 벌어지는 살육이 그런 물음을 품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는 이슬람 사회를 해석할 때 종교에 과도한 의미를 부과하는 것을 경계하고, 세계화 과정에서 자신의 정체성 일부를 늘 포기하고 체념해야 했던 사람들의 삶과 가슴이 얼마나 큰 고통에 시달려왔을 지를 헤아려야 한다면서, 그럼에도 ‘미래는 어디에도 쓰여 있지 않으며, 미래는 우리가 만드는 대로 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가 꿈꾸는 세상은 영어와 자유시장주의로 통일된 세계나 특정 종교로 ‘하나’된 세계가 아니다. 그는 또 종교가 없는 세계가 아니라 ‘정신성에 대한 욕구가 귀속의 욕구와 분리되는 세계’, 즉 집단의 요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집단의 요구와 개인의 의지가 분리되는 세계를 희망한다. 말루프는 ‘~을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같은 표현이나 자문하는 글투를 자주 쓰는데, 이는 중간자 또는 경계인으로 살아온 삶이 새겨놓은 겸손한 자세 탓이리라. 그래서 그의 문체는 담담하고 고민은 크고 생각은 넓으며 고뇌는 깊다.

그러나 세상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더없이 따스하다. 그가 그 탈 많은 나라 레바논 출신이어서 그렇다고 본다면 말루프는 자기 책을 잘못 읽었다고 할지 모른다. 이슬람 사람은 호전적이고 미국인은 민주적일 것이라는 ‘평범한’ 생각에는 말루프가 찾는 ‘개인’이 없기 때문이다. 토머스 프리드먼이 말하는 ‘온정주의적 평평화’보다, 세계화에 대한 말루프의 겸허하지만 솔직한 전망 앞에서 더욱 온기를 느끼는 이유를 나는 잘 모르겠다.

배미영/영남대 강사·영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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